백남운의 젊은 시절을 보면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강화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기까지는 계몽주의 우파적 성향이 짙었다. 그러나 1918년 백남운은 3년간의 교편생활을 마치고 동경으로 유학하여 동경 고등 상업 학교에 진학하였다. 1920년대를 풍미하던 민족, 사상운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는 않고 충실하게 학업에 열중하였다. 동경 상고에서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학을 받아들이는 한편, 역사학파 경제학 교수들의 특수성 즉, 일본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비판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특수성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은 그가 입문하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주의적 기준을 무기로 하고 있었다.
요컨대 성장기의 백남운은 현실의 민족운동보다는 학문의 길을, 조선의 구체성보다는 동경을 경유한 마르크시즘의 보편적 토대를, 전통적 또는 비정규적 수학이 아니라 동경 유학을 통해서 학자로 성장하였다.
1925년 귀국한 이후 연희 전문학교의 강사로 부임하면서 조선 경제 사학의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이 당시에 백남운은 ‘민족적 대립’을 ‘자본주의적 대립’과 일치시키는 초보적 한계와, ‘제국주의 식민 사학‘과 ‘근대 부르주아 사학’ 일반을 등치시키는 좌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요컨대 백남운 사학은 일본 좌익 사학계의 영향 아래 보편성에 치우친 것, 따라서 조선의 구체성/특수성에는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결론적으로 백남운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방법론과 사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교우 관계와 학회활동은 대체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의 성향이며, 이를 계기로 조선적 특성에 주목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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