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찌르자 오랑캐’의 북벌을 국시로 하던 세상의 젊은이들이 처음 북경에 도착했을 때 받은 문화적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사방으로 죽죽 뻗은 도로에 넘쳐나는 재화,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쌓여 있는 서책들, 고딕식 서양 성당과 서구 과학기술 정보들까지, 그들이 직접 목격한 청나라는 애초에 조선이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중국의 각종 서적과 사치성 소비재들이 서울로 흘러 들어오면서 외국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우리 것에 대한 자기혐오가 동시에 일어났다. 당시 북경에서 들여온 서책들은 겉으로는 전통적인 성리학 서적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패관소품문과 백과전서적 총서류 들이 더 많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대한 총서들이 들어오면서 예전에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금기시되었던 사물에 대한 관심은 어느새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위치로 격상되었다. 이전까지 사물은 마음공부와 이치 탐구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탐구의 대상으로 승격되었다. 18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이건 관심이 생기면 모으고 정리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모은 것이 아니라 목차와 범례를 세워놓고 단계를 밟아 작업을 진행했다. 집체 작업에 의한 편집서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 시기 지식시장의 성격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년 귀양살이 동안 제자들과 함께 500권에 이르는 각종 저작을 펴낸 정약용의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