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해방된 다음날 민족지도자 여운형이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연설하였을 때 민족 구성원 모두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의 벅찬 희망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이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①독립국가 건설 ②민주정권 수립 ③대중생활의 확보와 질서유지를 강령으로 채택하였는데, 해방 10여일만인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소의 ‘건준’지부를 설치할 수 있었고, 9월 6일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등 조직부서와 시정방침을 정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지지 속에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 작업은 활기 있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2. 분단의 움직임
그러나 해방된 기쁨의 땅에 전개되고 있는 이 당연한 추세와는 달리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즉 9월 2일 연합군사령부 명령 1호는 북위 38도선 이북의 지역은 소련, 그 이남의 지역은 미국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고 발표하였고, 9월 6일에는 남북간의 전화통신 및 우편물 왕래가 중단된다고 하였다. 또한 9월 9일에는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미군정을 선포하여 미군정청을 설치(9월 19일)하였고, 10월 10일에는 38도선 이남지역에는 오직 미군정부가 있을 뿐 그 어떤 정부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때 민족구성원들 사이에서는 38도선 철폐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그 무렵 중도적 민족주의자 안재홍은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38도선을 즉각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제출(9월 29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1945년 11월 무렵부터 미국 측의 정책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