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사르, 말레르브 등의 노력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지만 불충분했다. 사람들은 보다 견고한 이론, 모든 장르에 유효한 이론의 필요성을 느꼈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이탈리아 이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탈리아의 미학적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정 영향은 18세기 초까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16세기말, 프랑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전해졌을 때는 이미 이탈리아 비평가들에 의해서 그 원문이 연구 분석되었을 뿐만아니라 때로는 왜곡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비평가들의 임무는 선별과 조직화를 통한 대원리의 창출과 더불어 명확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에서 표현과 문체를 다루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예술작품의 원리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자 노력했다. 프랑스의 이론가들은 혼란되고 복잡한 전체로부터 1630년경부터 30여년 동안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고, 하나의 단일한 원칙인 이성에 결부되는 이론을 세우게 된다. 취미(goût)의 이론은 18세기에 가서야 바로소 인정을 받는다. 이들이 제시한 방법의 새로움은 더 이상 고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규칙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적인 저작 속에서 규칙을 찾고자 했으며 또한 작품들의 실례로써 이 규칙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사플렝(Chapelain)은 막 형성되는 이론의 대원리들을 최초로 가장 명확히 인식했다. 그는 고전주의 이론의 근본적인 원리들 중에서 진실다움(vraisemblence)의 원리, 삼일치의 법칙등을 이끌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