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5~6월에 발생한 프랑스의 정치 위기는 드골이 정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골의 정계복귀는 프랑스 국내 정치의 변화와 더불어 유럽통합의 과정에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몰고 왔다. 그것이 1965년의 빈 의자 위기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위기이다. 표면상 1965년의 위기는 공동농업정책(CAP)와 그것과 관련된 공동체의 제정문제에 대한 프랑스(정확하게는 드골)와 여타 5개국의 충돌이었다. 그 이면에는 초국가주의에 입각한 통합 과 국가연합의 유럽 이라는 두 사상의 대립이 있었다.
드골은 국가중심의 유럽 과 유럽인의 유럽 , 즉 미국을 배제한 유럽국가들로만 구성된 유럽을 지향했다. 드골은 그의 관점에 따라 유럽의 정치협력을 제안하였다. 정치협력의 필요성은 다른 5개국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즉, NATO 차원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순수히 유럽차원에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후자를 선택할 경우 드골의 구상대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유럽이 제 3의 블록을 형성한다는 것인데, 유럽은 그럴만한 힘과 수단을 갖지 못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여타 5개국은 초국가적 유럽기구를 통한 유럽과 미국의 원조와 방위참여가 보장되는 NATO내에서 정치협력으로 기울어 있었다.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