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해도 거의 저물어 갈 무렵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방침이 서방통신을 타고 전해짐으로써 한반도에는 엄청난 정치적 폭풍이 몰아 닥쳤다. 이에 조만식에 조선민주당을 비롯해서 우익계열은 격렬히 반탁을 부르짖었다.
2. 조선공산당의 신탁통치 찬성으로의 입장 변화
심지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산하의 군당조직에서도 신탁통치 반대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박헌영이 5일간의 비밀평양 방문을 마치고 해를 넘겨 서울로 돌아온 46년 1월 2일 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반대입장을 견지하던 조선공산당이 느닷없이 찬탁으로 급선회했다 이에 이남은 반탁의 한목소리로 모이는 듯했던 좌우는 완전히 결별했다.
신탁통치문제는 좌우의 대립을 불러오고 그것이 남북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진셈이다. 이 과정에서 수수께끼는 박헌영의 급선회 배경이다. 박헌영은 평양에서 김일성 소련군사정부 군정관계자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거기서 조선공산당이 입장을 급히 바꾼 것은 소련및 김일성이 행동지침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며 이같은 지침을 박헌영이 직접받아 왔다.
이 문제에 이어 두번째는 임시정부구성의 원권이 마련되었다. 공산주의 세력과 기타 세력이 비율을 2:1로 해서 이북의 분국과 이남의 좌익세력이 감각별개의 세력으로 임시정부에 들어가고 이남의 우익들 나머지 세력은 하나의 세력으로만 인정해 임시정부를 구성해서 공산당이 임시정부를 리드하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