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뛰세는 단호하게 이데올로기는 실재에 대한 (그릇되건 옳건간에) 의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 인간들에 작용(FM.233)”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고 알뛰세는 주장한다. 만약에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를 상정한다면 이는 다시 허위의식 개념을 끌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알뛰세는 사이비 지식의 해결자로서 인식주체를 상정하는 것을 비판하듯이 “주체” 대신 의식을 결정하는 무의식을 경유하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 그 이유는 주체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내에서의 구조적 효과가 주체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2. 알뛰세의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진실된 “주체”는 이러한 점유자 occupants 나 기능자 functinaries 가 아니며,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인류학이 갖는 “주어진 것”의 “명증성 obviousness” 즉 구체적인 개인들 또는 진실된 인간도 아니며, 이들 장소와 기능에 대한 정의와 분배인 것이다. 진실된 “주체”는 이들 정의자 definers 및 분배자 distributors, 즉 생산관계들(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이기 때문에 주체라는 범주 속에서는 고찰될 수 없다.(RC.180)
따라서 주체는 구성적인 주체가 아니라 구성된 주체이다. 하지만 구성된 주체라는 것이 그 주체가 스스로를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자율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
너와 내가 주체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어가 사물을 이름하거나 의미를 가지게 하는 자명성(언어의 투명성이라는 자명성)을 포함한 모든 자명성과 마찬가지로, 너와 내가 주체들이라는 자명성-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자명성- 은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LP.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