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산업자본이 독점자본으로 성장하면서 해외시장을 개척하려는 서구 열강들 사이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 식민지 침략의 손길이 동북아시아로 뻗치고 있었다. 영국은 1839년에서 1842년 사이에 청 나라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을 半식민지로 만들었고, 전쟁에 진 청 나라는 영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어 홍콩을 넘겨주고 상하이, 광저우 등 5개 항구를 개방하였다. 뒤이어 미국, 프랑스도 청과 불평등조약을 맺어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최혜국 대우를 받았다. 이후 1856년 광둥성에 정박 중이던 애로 호에 대한 시비를 계기로 영불 연합군과 청 나라 사이에 제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외국 자본주의 세력에 온전히 굴복한 청은 굴욕적인 텐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맺게 되었다. 같은 기간, 일본도 서구 열강의 출현으로 큰 변화의 문턱에 서 있었다. 남북전쟁을 끝내고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참여하게 된 미국은 1854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앞세운 이른바 포함외교로써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청나라와 일본이 서구 열강에 대하여 완전한 불평등조약체제에 편입됨으로써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에 큰 혼란과 변화의 조짐을 가져왔다.
이렇게 청과 일본이 구미 열강의 위협을 받자, 양국의 사이에 있는 이웃나라 조선에게도 그 위기감이 곧바로 미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조선의 해안에 자주 나타난 이양선은 처음에는 식수나 식량을 구하러 접근하였지만, 점차 통상을 요구하였다. 대원군이 집권할 무렵에는 이양선이 더욱 자주 나타났고, 나라 안에서도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외국에 대한 조선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러한 불안감은 곧바로 국내 정치에 반영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이른 바 쇄국정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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