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99년 2월,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믿지 않으며 다이몬이라는 색다른 것을 신봉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섰다. 평생 한 번도 기소돼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 자신이 죄를 짓거나 남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확신하는 바였다. 칠십 노인이 될 때까지 신에 대한 믿음을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저들이 자기에게 누명을 덮어씌우려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고소장에 적힌 내용일 뿐 그 이면에는 정치적 이해 관계가 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기원전 411년부터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회부될 당시까지 십 년이 약간 넘는 기간 아테네는 두 번의 쿠데타,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30인 독재 정권의 수립과 전복, 민주정 재수립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으로 무척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정치적 입장을 달리 하는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거나 국외로 추방됐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그런 일들이 강제로 집행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이 직접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정 아래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법정이 정적제거의 합법적 수단으로 악용되는 실정이었다.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자들은 멜레토스라는 젊은이와 아뉘토스, 뤼콘 세 사람이었다. 이 중 주목할 사람은 아뉘토스였다. 그는 피혁업자 출신으로 민주정 재건에 선봉적인 역할을 수행한 정치가였다. 목숨을 걸고 민주정을 쟁취한 아뉘토스와 그의 혁명 세력들은 현재의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아테네가 다시 과두정치나 귀족정치로 돌아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랬기 때문에 체제 수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제거하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