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발전에서 있어서 프랑스에서의 사태발전은 獨逸과 英國과는 사뭇 달랐다. “6월 폭동” 이후 1848년과 1849년의 짧은 기간 동안, 보다 용이한 신용대부․세제 개혁․토지 없는 농민에의 토지 지급․국가의 노동자 조직 후원 등을 요구하는 하층 중산계급․농민․노동자 등과 결합하여 부르즈와지에 저항하는 “사회-민주적” 동맹을 결성할 희망에 차 있었다. 社會主義공화국에 대한 이러한 비젼은 6월 폭동의 목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비젼보다 대체로 온건한 것이었다.
하원에서 지배적 다수를 얻게 될것으로 예상된 사회-민주적 동맹도 질서유지를 위해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팔트의 깃발 아래 뭉친 유산계층에게는 “공산주의자”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위협적인 것이었다. 1848년 12월에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7백 4십만표 중에서 5백 5십만표를 얻음)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 3세(그는 곧 그렇게 불려졌다)는 1851년의 쿠데타를 통해 제 2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 2제정을 수립했다.
2. 나폴레옹 3세의 집권과 통치
1848년 12월과 뒤이은 국민투표에서 나폴레옹 3세가 얻은 다수의 지지는 무엇보다도 농민의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매우 불명확하여 모든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로 하여금 그의 지배속에서 근대적 파시즘의 흥미있는 선구적 요소를 보게 했다. 그는 새 공화정이 부과한 세금에 분노하면서 아직도 나폴레옹의 신화에 젖어 있던 농민을 매혹시켰다. 6월 이후 공화정이 이행하지 않은 약속에 혐오감을 느낀 노동자들도 루이 나폴레옹의 깃발 아래로 모였으며 부유층들은 그의 백부가 50년전에 그러한 것처럼 그도 혁명적 불안의 시기를 극복하고 질서를 회복해줄 것으로 믿은 반면 다수의 小부르즈와지는 그가 부유층의 敵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