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80년 광주민중봉기를 거치면서 확연히 두 무리로 갈라섰다. 그 하나는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의 태내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결합하여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새롭게 태어난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반공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일반민주주의 운동의 틀 내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86년 전술논쟁과정에서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제한하고, 보수야당과의 연합에만 치중하면서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보다는 보수야당의 뒷꽁무니에 대중을 밀어넣으려는 경향과의 투쟁 속에서 철저히 노동자계급의 사상으로 대중을 조직하고 당면 투쟁을 지도하면서 사회주의운동의 확고한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더군다나 노조운동의 미성숙으로 인하여 노총등 황색(=어용)노조가 판을 치는 것이 그당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 내에 반동부르주아지의 영향력, 그리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극복할 때만 사회주의 진영이 노동운동 내에 지도세력으로 구축될 수 있었으며,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승리를 위해서는, 그리고 자유주의적 세력과의 노동운동 내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그에 적합한 무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노동자의 이익과 자본가의 이익이 화해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는 것임을 노동자 앞에 명백히 제시하고 노동자계급이 성취해야할 다가올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성격 및 제 조건을 그들에게 명확히 하며,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체 현상들을 지도할 수 있는 혁명적 계급당을 만드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즉 막 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의 승리를 위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부위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고, 이것이 86년 이후 본격적인 당논의를 촉발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