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미․소에 의해 국토가 38도선으로 분담됨에 따라 당시 국민당의 안재홍(安在鴻)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이는 38선의 철폐를 통일의 1차적 과제로 생각해 일반 국민이 분단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 최초로 나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안재홍은 1945년 9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에게 38선의 철폐를 요구하는 질의서를 전달했다. 이어 10월 10일에는 32개 정당이 38선의 즉시 철폐와 분단의 종결을 결의하고 이를 정강으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모든 정당은 좌우익의 구별 없이 38선의 즉각 철폐와 군정의 종식, 국토분단의 해소를 정강으로 삼았다. 다만 좌파는 찬탁, 우파는 반탁으로 분열의 골이 깊었다.
2. 좌우합작 통일론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 12월)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신탁통치 및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결론없이 1946년 5월 사실상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미․소를 각각 추종하던 남북의 정치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우리 내부에는 외세에 영합해 정파이익 찾기에 앞장선 세력과 민족통일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남쪽에서 가시화한 통일독립 시도가 바로 이 좌우합작운동이다.
좌우합작운동을 이끈 양날개는 우파의 김규식, 좌파의 여운형이다. 김규식은 미․소공동위 휴회 직후 열린 ‘독립쟁취국민대회’에서 “남의 손에 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이제 우리가 자율적으로 정부를 세우자”고 역설하고 그 방안으로 △ 남쪽에서 먼저 좌우파간에 합작하고 △ 이를 바탕으로 남과 북의 정파가 통합해 통일정부를 이루자는 좌우합작론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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