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과학자. 튀링겐주(州) 에르푸르트 출생. 상인 출신의 국회의원 아들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 대학․베를린 대학 등 독일 각지의 4개 대학에서 철학․역사학․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재판소의 사법관시보(司法官試補)로 근무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하였다. 1892년 베를린대학을 시작으로 프라이부르크 대학․하이델베르크 대학 등에서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였다. 베를린대학의 교수 자격 논문인 [로마 농업사(農業史)](91)와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강연인 [국민국가와 국민경제정책](95) 등은 당시의 중요한 논문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재직 중에,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쉽게 수리되지 않았다. 유럽 각지에서의 투병생활 끝에 1902년경부터 다시 연구생활에 들어갔다. 병후에는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의 편집을 맡아보고, [사회과학적 및 사회 정책적 인식의 객관성](1904)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1904~05) 등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고 퇴역 후 정치활동에 투신하였다. 패전 후에는 독일 민주당에 들어가 계몽활동을 하는 한편, 뮌헨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다가 20년 6월 갑자기 죽었다.
베버는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주류를 이룬 신역사학파(新歷史學派) 또는 강단사회주의자(講壇社會主義者)와 대결하였으며, G.슈몰러와의 가치판단 논쟁을 통하여 역사학파가 가지는 이론적 약점을 지적하고, 그 극복에 노력하였다. 《사회과학적 및 사회 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등에서 보인 그의 사회과학 방법론은 그 성과이다. 여기서의 그의 방법론상의 개념은 과학과 가치판단을 명확히 구별하는 이른바 몰가치성(沒價値性)이며, 또 사회현상에 대해서 인식주체(認識主體)가 하나의 문제의식(問題意識)을 가지고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이념형(理念型)이다. 그는 이로써 여러 역사적․사회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