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한국과 달리 일본의 유학은 처음부터 이단(異端)을 폭넓게 포함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중국철학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일본의 현실에서 유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확실히 토쿠가와 시대 초기의 유학자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조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유교-주자학-의 경전을 거의 성전으로 계시처럼 받들고 있었다.
이러한 유교의 가름침이 대체로 사회에 대해 보수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지배계급의 통치윤리로 이용되었지만, 그 내부에는 강한 지적 탐구심의 씨앗 뿐 아니라 회의론조차 포함하고 있었다. 일본의 유학자들은 일단 유교의 기본이론에 통달하자 그 가르침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문제에 응용하기 시작하였고 당연한 결과로서 새롭고 독창적인 해답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2. 주자학적 사유 해체
처음으로 “주자학적 사유(思惟)의 해체”를 주장하고 ‘古學’을 제창하였던 오규우 소라이는 정치운영의 면에서 막부에 매우 특이한 조언을 했는데, 그 정당성을 밝히기 위한 근거를 옛유교에 소급시켜 탐구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의 저서 [政談]은 막부에 실제적인 개혁을 촉구하고 쇼오군의 전제(專制) 또한 보다 확실히 내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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