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여러 설명은 흔히 마르크스주의를 獨逸․프랑스․英國 등의 지적 전통, 특히 獨逸의 철학, 英國의 정치경제학 (혹은 고전경제학), 프랑스의 社會主義이론의 종합으로 묘사한 엥겔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단순화시킨 이 형식화를 상기의 세 전통이 겹쳐져 있고 서로간에 영향을 행사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서 일종의 편법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가장 감명 깊은 것은 분명히 그의 극히 독창적인 통찰력-그 스스로 그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이 아니라 19세기 초의 이론과 현실을 일관성있는 하나의 전체로 집성하려고 시도한 방법이었다.
젊은 시절의 생활환경 덕분에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종합을 실현하는데 있어 아주 적절한 입장에 있었다. 모젤江邊에 위치한 기묘하고 고대적인 도시이며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의 국경으로부터 거리가 멀지 않은 트리에르에서 개방적인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를 접했다. 그의 아버지 헤르셀(Herschel)은 계몽주의적 가치를 수용했으며 중요한 계몽사상가들과 친숙했다. 트리에르市는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제국 시대-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이전-에 프랑스의 한 부분이 되었고, 그 결과 유태인은 완전한 시민권을 얻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후 트리에르가 프러시아에 점유되자 헤르셀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와 그의 가족이 유대인으로서 프러시아에서 받게 될 公的 지위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하인리히(Heinr-ich)라는 기독교도 이름으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