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독일의 패배 속에서 인민민주주의 정부가 등장하였던 동유럽과는 달리 중국에서의 신민주주의 혁명은 항일전쟁의 승리 이후에도 4년에 걸친 국민당과의 내전을 필요로 한다. 항일전쟁의 종료와 함께 중국공산당으로 대표로 하는 인민, 대중과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 국민당이 대변하는 대지주-대부르조아계급과의 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대두된다. 46년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 모두의 합의로 - 국민당의 수적 우세속에서 -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정치협상회의가 중국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냉전의 태동과 함께 미국의 반공주의의 강화라는 국제정세에 고무된 국민당에 의하여 46년 6월부터 내전이 본격화된다. 이러한 대세의 역전은 중국공산당의 ‘5.4조치’로 시작된 해방구에 대한 토지개혁의 진전과 국민당 점령지에서의 극심한 인플레와 국민당의 부패로 인한 민심의 이동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내전 막바지의 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 1차대회에서 신중국의 건국구 사이 공동강령으로 정리되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핵심을 정리하면 사회주의로이 직접이행이 아닌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주관적 조건의 창출을 목표로한 신민주주의 사회를 구상하고 이를 위해 4대가족과 전범소유의 기업 몰수 등을 통해 창설된 국영경제의 지도하에 자본주의 경제와의 장기적 공존이 전제되고 국제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에 힘입어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 기술적 전제의 결핍을 보충할 것, 사회주의로의 진입은 경제발전의 실제적 요구와 다수 국민의 요구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속에서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의 제물이었던 동양최대의 반식민지 중국에서의 혁명의 승리는 전세게의 민족해방투쟁을 고무시키는 역사적인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