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록영화는 적어도 1900년대 초반 까지는 초기 이야기 영화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것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류 오락영화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 기록영화가 영화 관객에게 호소력을 가졌던 이유는 물론 현실의 재현 능력 때문이다.
초기 기록영화의 주요한 두 범주는 시사 영화(visual newspaper)와 이국적 풍경을 다루는 영화(topical)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공간의 뉴스거리와 접해보지 못한 곳의 신기한 풍습과 경치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은 당시 영화만이 보유했던 능력이었다. 이것은 [삶의 자연스러움을 목격하는 놀라움]과 동시에 [나르시즘적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때론 [현실을 마술적인 대상으로 바꾸는 능력]이기도 했다. 초기 기록영화의 호소력은 곧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놀라움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초기 기록영화의 호소력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영화의 중심은 이야기 영화의 차지가 된 것이다. 과연 이 전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기 영화의 중심 영역이 이야기 영화로 바뀌는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0년대에 들어가면서 이미 이야기 영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고 길게는 1910년 까지 초기 기록영화가 오락의 기능을 수행한 영화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 시기는 대략 1900년대 초반에서 후반 사이라고 보면 무방하다. 이 시기 초기 기록영화가 주변적인 지위로 밀려난 이유에 대해 연구자들은 우선 초기 기록영화 자체의 호소력이 감소되었다는 견해를 보인다.
“초기 기록영화의 상업적인 성공이 비슷한 유형의 영화들을 양산한 반면 극영화 쪽은 기술적인 혁신(편집)을 통해 발전을 도모했으며..., 다음으로 상류층의 지원과 식민지 정책을 미화하는 방향으로 사실을 조작하는 기법이 유행하자 다큐멘터리는 신뢰성을 상실했다... 카메라를 의식한 원주민들의 행동이나 저명인사들의 이미지 관리 등으로 연출의 요소가 극에 달해 조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