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까지 존재했던 제도화된 계급은 인간을 구분하는 실재로서 기능했다. 인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간에게 있어 근간에 자리하고 있는 정체성은 계급이다. 각각의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 있어 평등했다. 물론 계급 내부에는 그 나름의 권력구도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계급이 아닌 권력으로 받아들였다. 즉, 계급 안에서 발생한 권력구도가 계급 차에 필적할 만큼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급에 가까울 뿐 결코 계급 그 자체는 될 수 없던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계급 안에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권력구도보다 그 계급이 가지고 있는 평등성과 동질성에서 기인한다. 당시 계급이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실재(real)이었다면 계급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구도는 계급의 재현(realism)이었다. 따라서 계급에서 오는 불평등은 실재에서 비롯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 반면, 계급 안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은 말 그대로 불평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평등은 늘 평등을 전제로 했을 때만 발생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계급 안에서 그 구성원들은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같은 인간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다른 계급은 결코 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과 불평등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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