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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중국불교 선종의 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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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중국불교 선종의 흥성
제4단계는 당말(唐末)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의 시기로 그 특징은 불교가 흥성에서 점점 쇠락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수당시기가 각 종파가 흥성한 최전성기였다면, 이후부터는 선종을 제외한 모든 종파는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불교는 오대(五代, 907~960)의 전란을 겪으면서 더욱 쇠퇴하였다. 특히 전통적으로 불교보호정책을 실시했던 북방제국 중 후주의 폐불정책으로 불교는 침체되었다. 그러나 남방의 오(吳)는 양주(강소성)에서, 남당(南唐)은 금릉(남경)에서, 민(閩)은 복주(복건성)에서, 초(楚)는 담주(호남성)에서, 남한(南漢)은 광주(광동)에서, 오월은 항주(절강성)에서 제각기 불교를 받들고 있었는데 그중 오월의 항주, 남당의 금릉, 그리고 민의 복주를 중심으로 한 불교가 특히 성행하였다.
당으로부터 오대시기를 거치며 힘을 잃은 불교는 송의 통일(960)과 황제들의 불교 외호에 힘입어 그 세력을 다소 회복하였다. 이러한 송대 불교부흥의 원인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송 왕실의 외호를 들어야 할 것이다. 송 태조는 즉위하자 우선 후주 세종의 폐불사건 이후 침체된 불교계의 부흥사업에 착수하였다. 물론 천하를 통일하고 민심안정책이긴 하지만 즉위한 건융 원년에 바로 폐불정지 조칙을 내리고 행자(行者, 참선과 탁발을 행하는 승려) 8천 명을 출가시켰다.
그리고 때때로 상국사에 행차하여 탄생일에 축수도량을 세우고 천하에 덕이 높은 승려를 불러 내전에서 시문하고 자의를 하사했다. 또 행근(行勤) 등 157명을 서역으로 보내어 법을 구하게 하고 다시 조칙을 내려 성도에서 대장경을 인쇄하게 하는 등 불교부흥에 진력하였다. 이후 태종이 즉위하자 남북의 전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고 불교중흥에 노력하여 동자승 17만 명의 출가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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