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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384~322)
1) 생애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의 시의(侍醫)로서 그의 어렸을 때의 환경이 경험을 중요시하는 후일의 학풍을 이루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18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들어가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간을 처음에는 학생으로 뒤에는 연구원으로 보냈다. 저술도 많았으며, 강의도 맡았다. 그는 플라톤의 고제(高弟)로서 플라톤과 같이 그리스의 최대의 철학자, 교육사상가로 박학하였으며, 백과의 조라는 칭호를 받았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에게 초청되어 알렉산더의 교육을 맡았고 그 후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교를 열고, 산보하면서 담론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후일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불려졌다.
2) 교육목적
첫째, 이성적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다. 과학을 통하여 이성의 훈련을 주장했다.
둘째, 행복한 생활을 이룩하는데 있다. 행복은 어떻게 얻어지느냐? 이성의 합리적 활동, 즉 덕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완전한 덕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사회적 성질은 국가에 의하여 가장 완전히 발휘되는 것으로 국가에 의하여 인간이 완전한 활동을 행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최고선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목적으로 보았다. )
셋째, 자유교육을 중시하였다. 자유교육은 여가를 이용하여 자유인으로서 여가를 중시하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적 교양을 위한 교육이 결핍되었던 스파르타 교육을 비난하였다. 자유교육은 신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활동을 중요시하였다.
3) 교육방법
가) 객관적, 과학적 방법을 사용
나) 개인완성을 위한 교육단계
(1) 자연적 요소 : 신체적 발육
(2) 도덕적 습관의 형성
(3) 이성의 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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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근본사상
3) 교육사상
4) 교육목적
5) 교육방법
6) 교육사상에 끼친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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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조각가 소프로니코스와 조산원인 모친 파이나라테 사이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 철학, 천문학을 배웠고,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했으며,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약한 바도 있다. 아테네의 교육자로서 그는 아테네인을 유덕하게 하는 것을 스스로의 사명으로 삼고 그의 일생을 아테네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다이모니아를 끌어들여 청년들을 부패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독형을 당하였던 것이다. 도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투철한 준법정신은 <악법도 법>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기며 실천하였다. 그는 73세의 생애동안을 그의 내심에 들리는 신의 계시 밑에 도덕의 개선, 진리의 보급을 그의 임무로써 이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2) 근본사상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인격, 사업, 학설 등은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저서를 통해서 더듬어볼 수 있다.
그는 단체주의, 객관주의 절대론의 입장을 지켰고, 보편적 필연성과 타당성,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또한, 모든 개인이 자기 자신 속에 진리를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근본원리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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