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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손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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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孫晋泰)
Ⅰ. 생애
손진태는 1900년 12월 28일 경남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재 부산광역시) 남창 마을에서 손수인(孫秀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아호는 남창인데, 그의 호는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딴 것이다. 1908년에 소학교에 입학했고, 1911년에는 서울의 중학으로 진학했다. 1920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2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동양문고(東洋文庫)에서 연구했다. 1932년 송석하 ․ 정인섭과 더불어 조선민속학회(朝鮮民俗學會)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을 창간하여 제2호(1934)와 제3호(1940)를 발간하였다. 또한 1933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로서 교단에 섰고, 1934년에는 보성전문학교에도 강사로 나가면서 문명사를 강의했다. 이어서 보성전문학교의 전임강사가 되고 1937년 9월에는 동교의 도서관장을 맡았다. 연희 전문학교에는 1941년까지 강사로 출강했다.
8․15 해방(1945) 이후에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49년에 서울대 사대학장, 1950년 서울대 문리대학장을 거쳐 문교부차관 겸 편수국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0년에 작고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되고 있지는 않다. 1981년에 태학사에서 『손진태선생전집』 6책이 간행되어, 손진태의 저술 전체가 집대성되었다.
그의 학문적 생애는 민족 항쟁기에 민속학자로서 활동한 시기1)1) 손진태가 민속학계에 남긴 그의 가장 큰 공로는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이를 학문으로 정립시킨 점이다. 그 이전의 최남선(崔南善)과 이능화(李能和)는 민속학을 역사연구의 보조수단으로 여겼고, 일제에 대항하는 ‘조선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 삼았었다. 따라서, 앞의 두 사람이 한국민속학의 텃밭을 일군 선구자라고 한다면 손진태는 그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매가 열리도록 진력한 중흥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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