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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재 제8장 ‘민장 속의 다양한 모습’을 읽고 민장 작성하기. 아래 내용을 포함하여 작성(25점)
① 자신이 조선시대 살고 있으며, 거주지나 고향에서 ‘등장을 올리는 대표자’가 되었다고 가정함.
② 직접 민장을 작성. 작성하는 이유, 요구조건 등을 민장에 기재
③ 민장에 대한 관의 대응, 그리고 그 결과 등에 관한 내용을 적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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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천을 주제로 한 민장의 작성
1-1. 조선시대 인천
1-2. 민장의 작성
1-3. 민장 작성에 대한 관의 대응 및 결과
2. 관료와 양반의 삶
2-1. 조선시대 경주 정씨(양정공파) 정희자
2-2. 학습과 과거시험
2-3. 관료와 양반으로서 활동
3. 생각 및 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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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천을 주제로 한 민장의 작성
1-1. 조선시대 인천
조선은 대내적으로 토지경제 정책 및 유교적 교화 활동을 하는 유교 지치 주의 국가이면서, 대외적으로 중국 명나라처럼 쇄국정책인 해금 책을 폈던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으로 통하는 뱃길인 황해의 바닷길이 전면 금지되었으며, 내국인 및 외국인의 오고 감이 상당히 규제되었으며, 귀화 신청을 하지 않은 외국인의 경우 모두 추방 처리되었다. 무역을 기반으로 한 상업의 발달과 사신의 왕래 과정에서 접대하는 등 이를 통해 번성을 누렸던 인천지역의 경우 사회가 가지고 있던 기능을 잃어버리면서 평범한 농어촌 지역으로 변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중앙정부의 집권 강화 정책에 맞물려 경원부는 인천군의 단위로 강등 및 축소되고, 강화나 부평 일대도 군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지역으로 일개 도호부의 성격으로 하락되었다. 당시 경원부 이전에 사용했던 인주(仁州)라는 이름에서, 행정구역의 원칙에서는 지방행정구역이 특별한 성격을 갖지 않는 경우 뒷글자를 산(山) 및 천(川)을 붙이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인천(仁川)’의 행정구역적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인천지역은 한적한 농어촌 사회였으며,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였다. 다만, 세조 당시 국방체계를 강화하는 목적에서 개편이 이루어지며 강화 및 부평처럼 도호부 격이 되는 변화가 있었다(1459). 그러다가 1600년 전후 왜란과 호란을 잇달아 겪으면서 인천지역은 다시 한번 국방상 요충지로 부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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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영(2004), “조선시대 관료사회의 신참례와 계회도”. 역사민족학 18호. pp.135-164,
오종록(2005), “朝鮮時代의 官僚制度 및 그 운영의 특성-부정부패의 구조적 원인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130호. pp.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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