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Ι. 서론
Ⅱ. 본론
1. 태조의 훈요 10조의 내용과 발견경위
2. 훈요 10조 위작설
1) 위작설의 역사
2) 위작설 정리
3. 위작설에 대한 반박론
4. 훈요 제8조에 대한 해석문제
1) 풍수지리적 해석
2) 훈요 제8조 재해석
3) 훈요 제8조에 대한 새로운 관점
Ⅲ. 맺음말
Ⅳ.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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Ι. 서론
근래 궁예를 연기한 김영철 배우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태조 왕건을 다시 찾아보고 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방영하는 태조 왕건은 실시간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볼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학계에서도 태조 왕건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 시기인 삼국시대 기록이 빈약했던 것이 고려시대에 와서야 많아지는데, 그 고려시대의 첫 번째 왕이기 때문이다. 특히 왕건은 20대 초반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여 관련한 기록이 매우 많다.
그런데, 이처럼 기록이 상세한 왕건의 유훈(훈요 10조)이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후대에 발견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일본학자인 이마니시 류는 훈요십조가 후대의 위작이라 말했으며, 이후 여러 국내 학자들이 이 이론을 따랐다. 그러나 해방 후 이병도(1948, 1980)에 의해 부인되었고, 이후 김상기(1959), 김성준(1979), 이재범(1997), 김갑동(2002), 김기영(2003), 신호철(2003) 등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어 지금은 훈요 10조 위작설은 학계에서는 거의 폐기 수순을 밟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아직 훈요 10조 중에 제8조 차현이남에 대한 비정 및 해석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본고에서는 훈요 10조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제8조에 대한 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태조의 훈요 10조의 내용과 발견경위
김갑동(2002)에 의하면 훈요 10조는 태조 26년(943), 왕건은 자신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자 동년 4월 자신의 최측근인 박술희를 불러 친히 쓴 훈요 10조를 주며 “…중략… 후사들이 뜻과 욕심을 방자히 하여 기강을 무너뜨릴까 크게 근심한다. 이에 훈요를 기술하여 뒷세상에 전하니 아침저녁으로 펴보고 길이 거울로 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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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응석, 2018,「태조 왕건의 유훈, 훈요 10조」,『내일을 여는 역사』통권 제71·72합본호.
김병인·김도영, 2018,「고려 태조의 訓要 8조에 대한 재검토」,『도서문화』제52집.
김수태, 2018,「고려시대 지배세력의 지역적 기반과 훈요 제 8조 – 충청남도와 관련된 논의를 중심으로」,『지방사와 지방문화』제21권 제1호.
이재범, 2012,「고려 태조의 훈요 제8조에 대한 연구 -‘차현이남 공주강외’지역에 관한 해석」,『고조선단군학』제26호.
신호철, 2003,「高麗 太祖의 後百濟 遺民政策과 '訓要 제8조'」,『梨花史學硏究』제30권.
김갑동, 2002,「왕건의 ‘훈요 10조’재해석: 위작설과 호남지역 차별」,『역사비평』60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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