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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어제와 오늘 - 663년의 백제부흥군 지원과 패전, 이후의 일본 대응(하쿠스키노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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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어제와 오늘 - 663년의 백제부흥군 지원과 패전, 이후의 일본 대응(하쿠스키노에 전투)
일본이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한창일 때, 한반도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신라에 비해 한 수 앞선 국방력을 지닌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기습적인 양공작전을 견디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이때가 서기 660년, 비록 다이카 개신으로 소가 씨 세력을 일축하긴 하였지만 백제계 도래인의 세력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소가 씨 일문에 해당하는 멸문지화였을 뿐이다.
더구나 일본 천황가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할 만큼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당부분을 백제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버팀목이었던 백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백제 부흥운동과 발맞추어, 국내에 있던 백제계 도래인의 출병 요구는 거세어 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일본에 볼모로 있던 백제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부흥군에 가담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성공할 듯 보이기도 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흑치상지는 한 때 3만 명의 백제 군대를 수습하여 당의 소정방(蘇定方)을 격퇴하고 임존성등을 비롯한 200여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복신은 주로 백제 부흥군과 일본천황가 사이에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국 ‘칠지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야마토왜(大和倭) 왕 사이메이(齊明)는 백제왕족 복신(福信)의 요청으로 백제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백제를 부활시킬 것처럼 보였던 부흥군은 차츰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당군은 총 병력 40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증원 파병하였으며, 흑치상지는 친구인 지수신과 함께 당나라 장수인 유인궤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라와 당 연합군이 고구려 공략에 집중하는 동안 복신은 임존성과 주류성, 부성과 웅진 일대를 회복 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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