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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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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나서
사도 세자의 죽음은 조선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불리어 진다. 외척들이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심지어는 그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와 부인인 세자빈 혜경궁 홍씨마저 그를 죽이는 데에 일조한다. 이 뒤에는 조선 사회를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당파 싸움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조선은 노론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론의 힘이 강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혜경궁 홍씨가 속한 가문은 오랫동안 조선을 장악하다시피 한 가문이었다.
비극은 사도세자가 노론을 지지하는 외가와 다른 사상을 품었을 때부터, 혹은 혜경궁 홍씨가 남편의 신변보다 가문의 이익을 우선시 했을 때부터 초래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큰 아이러니가 생긴다. 영조는 당파와 무관하게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이라는 훌륭한 정책을 추진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영조는 왜 자신의 아들이 당파 싸움의 정점에서 방황하다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영조가 만들어낸 탕평책에 끝내 해결되지 못한 큰 모순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순점이라는 것은 탕평책이 영조의 순수한 신념에 근거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라는 정당성을 입증하고 치열한 당파 싸움 속에서 왕으로서 자리 잡기 위한 자신의 일종의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노론과 합세하여 자신의 형인 경종에게서 선위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경종은 병약했고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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