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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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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徐一) 선생
1881. 2. 26~ 1921. 8. 28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徐一)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교육자․종교인․언론인이기도한 선생은 1921년 소위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동지를 잃자 자결로 민족에 사죄했다. 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백포(白圃)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 선생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제(日帝)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 그 힘은 강고(强固)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 선생이다.
독립군 양성…청산리(靑山里)전투 대승 이끌어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단에서 백묵가루를 마시던 약골의 선비 서일(徐一)을 무장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가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 그 마지막 10년동안 흘린 피와 땀과 사자후(獅子吼)가 희미하게 역사에 남아있다.
혁명가 서일 선생에 대한 흔치않은 증언과 색깔 바랜 기록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의 이름은 청산리 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선생은 1881년(高宗 18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포(白圃)
함북 경원(慶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기학(蘷學)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一)로 바꿨다(大倧敎, 보훈처 기록).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成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기(氣)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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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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