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를 펼쳐 읽었을 때 처음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말갈은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세운 것인데, 주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었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라고 배웠다. 그런데, 말갈( 靺鞨 ; 또는 물길 < 勿吉 >과 발해 < 渤海 > )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추장 조영은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러 스스로 진단( 震旦 )이라 부르다가 선천 ( 先天 )중에 비로소 말갈이란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라고 되어있다. 또 삼국사에서는 ‘의봉 ( 儀鳳 ) 3년 고종 ( 高宗 ) 무인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 太伯山 )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는데, 개원( 開元 ) 20년 사이에 명황( 明皇 )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玄宗 ) 갑술년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 登州 )를 침략하니, 현종이 토벌하였다.’라고 했다. 또, 신라고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구장( 舊將 ) 조영의 성은 대씨( 大氏 )인데,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했다.’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말갈과 발해의 관계가 모호하고, 각 역사서의 내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내용 -그것도 우리나라가 우월성을 가지는 - 을 교육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는 일본이 자국의 국사책에 조선 침략을 ‘진출’로 표기한다고 해서 항의하는 것에 비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반드시 타국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발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탐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고, 정확한 서술을 교과서에 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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