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간섭과 명성황후 시해사건(明星皇后 弑害事件)
▲ 목 차
Ⅰ. 머리말
Ⅱ. 황후의 정치참여 배경과 과정
Ⅲ. 황후 시해사건의 경과
1. 당시의 국제적 상황 - 삼국간섭
2. 일본정부 주도의 황후 시해
Ⅳ. 황후 시해사건의 결과
-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Ⅴ. 맺는말
Ⅰ. 머리말
최근 일국의 국모로서 그 당당한 면모가 강조되면서 재평가 받고 있는, ‘명성황후(明星皇后)’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했는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시아버지와 갈등을 빚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간사한 여우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녀가 지닌 이미지뿐 아니라, 그 명칭에 있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1)1) ‘민비(閔妃)’, ‘민왕후(閔王后)’. ‘민황후(閔皇后)’, ‘명성황후(明星皇后)’ 등 명칭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897년 10월 12일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선언되면서 ‘고종왕’이 황제로 즉위하였고 이후 ‘황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정식명칭인 ‘명성황후(이하 황후)’로 표기하겠다.
이는 황후 시해 이후에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해, 그녀의 이미지를 간교하고 간사하게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2)2) 1885년 당시 조선의 국모가 일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을 가리켜, ‘민비암살(閔妃暗殺)’, ‘을미사변(乙未事變)’, ‘을미지변(乙未之變)’, ‘명성황후 시해사건(明星皇后 弑害事件)’ 이라는 여러 표현이 있다. 여러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면, ‘암살(暗殺)’이란 주로 정계나 재계의 요인이 대상이 될 경우, ‘을미사변’이나 ‘을미지변’에서 ‘변(變)’이라는 표현은 사고나 횡액을 당했을 때, ‘시해(弑害)’라는 용어는 왕족이나 자기 직계 존속이 살해되었을 시에 고인에 대한 존대의 취지에서 사용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시해사건(弑害事件)’으로 표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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