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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화와 농민.천민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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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세기 사회경제의 변화와 지배체제의 동요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모순의 심화
농업생산력이 꾸준히 발달하는 가운데 고려시대 농민들은 산전을 널리 개간하였다. 특히 12세기부터 수리시설과 농지개간에서 기존의 산곡의 계류를 이용하여 축조하던 제언 위주의 수리사업에서 저습지와 연해안 개발을 위한 하거(河渠) 공사와 방조제 공사 위주로 주로 변화하였다. 이는 농경지가 점차 저습지나 연해지역 쪽으로 확대되어갔음을 의미한다. 또한 새로운 볍씨가 도입되고 분전(糞田)을 통해 시비기술이 진전되어 갔으며, 선진적인 양잠기술도 수용되었다.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상업․수공업 등의 발달을 자극하였다.
이 시기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주로 국가나 지배층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각종 농산물과 수공업제품이 유통되었다. 고려는 거란과 여진과의 무역도 활발하였으나 송과의 무역은 11후반에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 요구로 금속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은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일부는 경제적 지위가 상승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농민들이 더욱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유망하였다. 또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자연히 토지에 대한 소유의 열망을 고조시켰다. 권세가 들은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하는 경향을 보이고 권세가나 지방관들에 의한 수취 또한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생활의 기반인 토지를 빼앗기고 몰락하거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라도 가중되는 수취와 중첩된 수조권에 의해서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고려는 수취제도를 본래 군현제와 부곡제, 주현과 속현을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운영하였다. 따라서 부곡제 지역과 속현의 주민들은 일반 군 현에 비해 더욱 과중한 수탈을 강요받았다. 이 때문에 12세기초부터 확대된 유망현상이 속현과 부곡제지역에서 훨씬 심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이 12세기에는 생산력 발전에 따라 사회구조의 모순이 심화되어 나타났다.
지배체제의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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