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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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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花店>의 재조명
1. <쌍화점>의 작자문제―창작가요 여부 등 몇 문제와 관련하여―
「高麗史」 樂志 俗樂條를 대상으로 검토해 보면 <쌍화점>이나 혹은 <사룡>을 누가 지은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행신인 오기(오잠)등 네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남장을 조직한 과정과 <쌍화점>·<사룡> 등의 노래를 그들에게 ‘가르쳤다(敎閱此歌)’는 표현은 있어도 어느 누구가 ‘지었다’는 명쾌한 지적은 없다.
이는 「高麗史」 列傳 金元祥條를 살펴보면 증명된다. <태평곡>을 듣고 왕이 ‘此非能文者 不能 誰爲耶’라고 경탄한 대목을 놓고 볼 때 <태평곡>이 결코 <쌍화점>이나 다른 속요와 같은 종류의 노래가 아닌 당악류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쌍화점>은 당시의 가치척도로 재단할 때 能文者(왕이 말한 能文者란 漢詩文에 달통한 사람임이 확실하다)의 作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下級의 노래이다. 또한 「高麗史」 列傳 金元祥條에서는 ‘製’의 사실을 분명히 해놓음과 동시에 이를 ‘習’의 행위와 엄격히 구별해 놓고 있다. 이를 통해서 「高麗史」 樂志 俗樂條의 기술 양식과 차이가 있음을 알게된다. 「高麗史」 樂志 俗樂條에서는 오잠등 네 사람이 등장하지만 ‘가르쳤다(敎閱)’는 서술은 있을지언정 <태평곡>의 경우처럼 누가 지었다는 사실이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製’에 해당되는 기술은 특정인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忠烈王朝所作’이라고 한 대목에서나 발견되며 이는 단지 충렬왕 때에 생성된 작품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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