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 인물
|
|
|
|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 인물
책을 펴 보았을 때 이상하게도 낮익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전에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그때의 기억으로는 한 인물을 선정하였고 책에서는 그 인물의 잘못을 썻지만 나는 그를 현시점(요즈음의 성향)으로 생각해서 오히려 처세술이 뛰어난 자라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하지 않겠다.
책을 보면 쉽게 알수가 있다. 몇 사람들은 태어난 연도나 죽은 연도가 미상이다. 전자는 이은찬(~1909), 후자는 장직상
(1883~)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은찬은 장직상에 비해 만게는 10살 적게는 5살 정도 위이다. 사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똑같은 나이라고 해서 성장이 같지는 않다. 이은찬은 의병장, 장직상은 친일 부호 서로의 길은 달랐다.
나에 입장에서 보면 장직상은 옳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수 있지만 과연 그럴까
장직상은 한말 경북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둘째 아들로서 1883년 3월 16일 경북 칠곡군 안동면에서 출생했다. 장승원은 경상도 제 1의 부호로서 첫째 장길상, 둘째 장직상, 셋째 장택상의 아들을 두었다. 장직상의 아버지 장승원 1917년 박상진의
대한광복회에 의해 처단 되었다.
장직상은 ‘합방’ 이후 일제의 관료로서 신녕∘하양∘선산 군수를 역임하였고 1916년 퇴관하여 고향에서 지낼 때 아버지가 대한광복회에 살해당하였기에 변을 당할 염려도 있고, 자신의 자본을 성장시킬 수 없다고 판단 거주지를 대구로 하였고 토지자본을 금융자본으로 전환하였다. 1917년 대구은행과 선남은행에 자본을 투자 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의 상층 부르조아 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여 기업의 설립을 자유화하는 정책과 지주자본을 기업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20년 조선인 지주 자본가에게 4개의 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했고 이에 장길상, 장직상은 경일 은행을 설립하였다.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