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전혜린과 뮌헨
|
|
|
|
전혜린과 뮌헨
시인도 아니었다.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번역문학가'라고나 할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번역서 목록의 일부다. 번역이 아닌 그 자신의 글이라고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인 여자.
근엄한 문학사에서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의 글들은 이른바 문학적 가치나 문학사적 의미와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사회사적․정신사적 범주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여자를 형성시킨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상처와 폐허였으며, 그 여자가 형성에 기여한 것은 60년대 한국의 미숙한 실존주의적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50년대 후반 4년간의 독일 체험이 놓인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 조건에 절망하고 삶의 구체적 세목이 보이는 평범과 비속을 혐오했던,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여자. 한국이라는 박토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뮌헨의 자유를 호흡하고자 했으며, 여자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적 성을 지향했던 여자. 인간이라는 육체적 현존이 아닌 정신과 관념만의 그 어떤 추상적 존재를 열망했던,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마침내는, 좌초했던 여자. 그 여자의 이름 전혜린.
전혜린(1934~65)이 단신으로 독일의 뮌헨에 내린 것은 1955년 가을이었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해주와 그가 학교를 다닌 서울은 각각 북조선과 한국으로 갈라져 한바탕 피의 제의를 치른 뒤끝이었다. 분단 한국의 딸 혜린은 또다른 분단국 서독의 남부 도시 뮌헨을 찾았고 대학 근처의 동네 슈바빙에 짐을 풀었다.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