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1945년 한국에서의 방송, 문화적 주도권과 식민지 근대성>
- Micheal Robinson
1927년 2월에 한국에서는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었고, 정규방송이 시작되었다. 식민지의 말기에 이르러 사택, 다방, 음식점, 공공 상점, 학교, 마을회관 등에서 사용이 허락된 라디오는 어림잡아 305,000대였고, 경성방송국은 일본, 만주, 중국과 프로그램을 교환하기 위해 국내의 방송망 위치와 중계시설 등을 구석구석 찾았다.
식민지에서의 모든 정보는 엄격한 중앙의 통제 아래에 있었고, 일본 관리들은 일본어 사용과 일본 문화의 가치를 보급하기 위한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방송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일본인들은 ‘한 몸으로써의 일본과 한국’이라는 슬로건 아래 정보통제와 문화적 동화활동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라디오는 이것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더 잘 조사해보면 식민지의 라디오 이야기는 더 많은 의미를 가진다. 비록 식민지의 라디오가 중앙으로부터 엄격하게 통제되었을지라도, 창조와 확대의 문제는 어떤 중요한 문화정책을 만들기 위해 조선총독부에게 요구되었다. 특히 일본의 권위는 한국어 시스템을 청취자들에게 보급하고, 청중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방송은 처음 6년의 경험으로 (1927~1933) 한국인들의 라디오 구매와 사용을 끌어당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논증되었다. 이렇듯 처음 6년 사이에 식민지 방송의 혼합된 언어 채널은 한국어 채널의 추가에 의해 보충되었고, 라디오의 판매는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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