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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에이치슨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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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한국전쟁과 에이치슨 발언
- 6.25 직전 프레스 클럽 연설의 배경과 진의
브루스 커밍스
그 당시 나는 풋나기였고 열정적이었으며 서툴렀다. 다른 사람들과 협의를 하지않고 원고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경우, 자신이 매우 심각한 오해를 받을 소지를 남기게 되는 것임을 알았어야했다. - 딘 에이치슨
그것은 우리의 왜곡된 표현에 기초한, 그들의 오산이었다. - 리차드 닉슨
우리는 한국 전쟁 한해 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NSC(국가안전보장회의)48'이라는 아시아에 관한 새로운 문서와 그 문서가 나오기까지의 결정과정에서 구체화된 바의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했다.(이 글이 실릴 책의 앞부분에 관한 언급인듯 - 역자주) 공식 정책서류들의 밑바닥에는 수많은 새로운 가정들이 놓여 있었는 데, 그것은 대소봉쇄와 역전(roll back)정책이라든가 세계 경제에서 일본의 위치, 팽창주의적이라고 추정되는 중국의 경향들에 관한 가정들이었다. 이러한 가정들이 관료기구 내부에서 걸려져 확정된 정책으로 됨에 따라, 흔히 한국전쟁의 결과로 나왔다고 생각되는 결정들으 대부분은 당시 이미 내려졌거나 예견되는 상태였다. 즉 대소봉쇄정책의 동아시아에로의 확대,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인들에 대한 군사원조 제공, 중화인민공화국의 승인 거부, 아시아의 후배지 하나를 일본 경제의 필요에 긴박시킨다는 패권주의적 구상, 그리고 한국 전쟁에 적용된 '봉쇄 대 역전'의 변증법 등이 그러한 결정들이었다.
그러나 이 설명에서 한가지 걸리는 게 있다. 독자는 이미 펄쩍 뛰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의 '프레스클럽 연석'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김일성에게 보낸 에이치슨의 '파란 불'신호는, 아무래도 봉쇄에 의한 전쟁억제의 구조를 가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오히려 미국의 공신력에 대한 치명적 실수였으며, 고삐풀린 전세계적 간섭정책이라기보다 현명치 못한 퇴각으로서, 1950년 6월 27일의 용감한 결정에 의해서야 마지막 순간에 겨우 파국을 면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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