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靑 교체’ 격랑 속 사투 벌이다 희생된 ‘경계인’
1619년 3월 ‘심하(深河) 전투’에서 패하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한 뒤부터, 더 정확하게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조선 후기 내내 강홍립(1560∼1627)은 역사적으로 ‘매장’되었다. 그는 이제 조선군의 ‘도원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해 나라를 망친 ‘역적’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극단론자들은 강홍립 때문에 명군도 패배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명이 요동을 잃어버린 책임도 그에게 있다고 매도했다. 송시열(宋時烈) 등이 그에게 ‘강로’(姜虜, 강씨 성의 오랑캐)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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