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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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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요약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 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 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 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 을 군신 관계 로 개약 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달라 고 요구해왔다.
이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후금의 요구 사항이 이처럼 터무니 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 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 을 보였다.
그러던 중그해 2월 용골대, 마부대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리고 인조비 한씨 문상을 겸할 요량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들은 맹약을 바꿔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개약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이 후금 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이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칠 것을 극 간했고 인조도 이에 동조하여 후금 사신이 가지고 온 국서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민가의 마필을 빌려 급히 본국으로 도주 해갔는데, 이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조선 조정이 평안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그들에게 탈취당하고 만다.
이 유문은 전시에 대비하여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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