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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전쟁사 - 합스부르크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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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전쟁사 - 합스부르크 왕가 (The House of Habsburg, The House of Austria)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인 베르너와 그의 매부인 라트보트 백작이 1020년에 아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르가우(지금의 스위스)지방에 세운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 매의 성 )에서 유래했다.
라트보트의 할아버지인 군트람은 이 가문의 조상 가운데 기록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조이다.
군트람은 아마도 950년에 독일의 왕 오토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트람 백작과 동일인물인 듯하다.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에 의해 1273년 루돌프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교묘한 정책결혼으로 오스트리아공령(公領)을 가령(家領)으로 몰수하는 등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14세기 스위스독립전쟁에서는 패하였으나 동쪽으로는 가령을 더욱 넓혔고 루돌프 4세 때는 대특허장을 위조하여 대공(大公)이라 칭하였다.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신성로마황제가 된뒤 합스부르크가는 사실상 황제 지위를 독점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혼인정책으로 에스파냐·부르군트를 합병하였고 손자 카를 5세 치하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을 이룩하였다.
1522년 카를 5세는 상속에 관한 브뤼셀협약에 의하여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의 가령과 황제위 계승권을 양도하고 26년 보헤미아·헝가리를 합병하였으나 독일의 종교개혁 및 분쟁으로 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맺고 56년 스스로 퇴위하였다.
카를 5세의 장자 펠리페 2세가 반(反)종교개혁을 추진하여 에스파냐왕국은 전성기를 맞았으나 프랑스·영국에 이어 네덜란드와의 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종교분쟁과 상속다툼으로 페르디난트 2세 때는 30년전쟁으로 발전하여 국토가 황폐하여 졌으나, 가령에서는 레오폴트 1세가 전(全)헝가리를 확보하여 빈은 다뉴브제국의 중심이 되어 바로크문화를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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