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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이단아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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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이단아 허균
하나의 문화가 다른 지역과 교류 없이 고정되어 있다면, 더 이상 창조적인 문화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문화는 언제나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문화적 지형도를 그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책을 접하고 새로운 영역을 읽어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기본적인 임무인 것 같다.
허균은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오면서 1,000~2,000 여 권의 책을 구해 왔다. 지금도 그 정도 분량이라면 매우 큰 짐인데, 근대 이전 책의 크기와 부피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분량이었음에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 인물과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는 동안 허균은 책방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 했던 것이다. 그렇게 강렬한 독서열과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허균의 삶과 생각을 변화시킨 것은 아닐까.
비록 현실 속에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호민론(豪民論)] [유재론(遺才論)]등 혁명적인 글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각별한 독서 이력 때문으로 보인다. 허균의 다독은 그가 남긴 문학과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파장을 미쳤을까. 허균의 특이한 독서 이력을 들여다보자.
허균은 평생 많은 책을 사 모아 읽었다. 그의 독서 범위가 딱히 정해져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고전을 비롯해 당시 중국의 새로운 서적에 이르기까지 그의 독서 편력은 아주 대단하다. 이 같은 독서열은 [한정록(閒情錄)]과 같은 책으로 엮어져 나오기도 했다. [한정록]은 허균이 42세(1610년) 때 천추사(千秋使)의 임무를 받았으나 병으로 맡지 못하고 집에서 쉬는 동안 만든 책이다.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들이 정신적·물질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료와 농사법에 관한 정보를 수록한 교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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