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회 안디옥파와 알렉산드리아파의 해석의 차이들도 결국 역사와 진리 문제였다. 문자적 역사적 면을 강조한 것이 안디옥파라하면 후자는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역사적인 것은 우연적이고, 유동적이라서, 역사는 결정된 진리를 결코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영원한 실재성 같은 이상 세계가 성경 이야기 속에 반영된다 하였다. 그래도 이것은 본문 안에 머물면서 영원한 영의 의미를 찾는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중세기 해석학 역시 상태적인(동태적이 아닌)말씀 세계를 개진하려 했던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는 말씀안에 밀착되어 있고 말씀 안에서 연구되었다. 역사는 이미 주어진 화폭에서 더 발전시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는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였으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신구약의 역사를 빠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화폭은 전포괄적인 말씀 세계 그것이었다. 종교 개혁 당시는 역사의 문제가 신랄히 도전받게 되었다. 중세기 성당의 격납고는 허물어지고 인간은 벌거벗은 채 하늘 아래 서서 다시 구원문제를 서슴없이 새로이 진술하는 시기였다. 현재의 구원을 묻는 현편에서 볼때 종교 개혁 당시의 사람은 과거의 구원을 물었던 중세인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역사의 문제는 이 구원 문제보다 더 강인해서 자기가 맏는 바의 구원의 객관성을 구원 사역의 역사적 객관성과 성경 본문에로 더 강하게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의 기독교는 종교 개혁의 진리와 유산을 보존하고 교정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해석학상의 치명타를 초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