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한 힘을 통해 집권한 모든 정부가 그러하듯이 전두환 정부도 정치적 숙청으로 권력을 확보하고 개혁의 제스처로 집권의 정당성을 꾀하고자 하였다. 9월 17일 내란 음모 혐의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며(이후 그는 무기징역, 20년형으로 각각 감형되었다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1월에는 부패와 정치적 소요의 책임을 물어 정치인 811명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전두환 통치의 초기에 정치 사회는 의미 있는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은 1983년 5-6월 자택 연금 속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1982년 5월의 장영자 사건과 이듬해 8월의 명성 그룹 사건, 영동 사건 등 큼직한 금융 부정 사건으로 정치적 정당성에 더욱 먹칠을 한 정부는 계속되는 시위와 항의 속에서 유화 정책으로 선회하였으나, 야당의 지도자들인 김대중과 김영삼은 여전히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있었다. 두 야당 지도자들은 1984년 5월 18일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에 착수하였다. 이는 이후 신한 민주당(신민당)의 모체가 되었다.
2. 양김의 정치적 분열
선거를 며칠 앞둔 2월 8일 김대중이 정부의 허락으로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신한 민주당의 열풍에 불을 질렀다.
이러한 힘의 교착 상태를 깨뜨린 것은 4월의 이른 바 4・13 호헌 조치였다. 이를 통해 집권 세력은 힘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이 조치는 당시까지 진행되던 모든 개헌 논의를 올림픽 이후까지 유보하고 연내에 현행 헌법으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이양할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조치와 함께 집권 세력은 정치적 탄압을 재개하여 김대중을 가택 연금하였으며 야당 의원을 구속하고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통일 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