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리학은 여건이 중국의 성리학 발흥기와 비슷했던 麗末鮮初에 싹터 중국의 성리학과 비슷한 기능을 행하게 된다. 고려말기에는 귀족의 대토지 소유확대로 인해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이들 소수 귀족들은 元이라는 대외세력을 업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내정의 개혁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적 과제까지 함께 안고 있었다. 麗末의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新進 士大夫들은 佛敎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인 性理學을 그들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는다.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된 계기를 보통 安珦, 白頤正 등 원에 유학했던 학자들의 도입과 보급에서 잡고 있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서부터 주자성리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楊時・文彦博・王安石 등의 유학이 이미 고
려에 알려져 있었고1)1) 文喆永, 「麗末新興士大夫의 新儒學 수용과 그 특징」 (한국문화 3,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2) 참조.
고려말의 주자학 도입과 수용은 고려중기의 성리학 이해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원에서 주자중심의 성리학이 도입되기 이전에 성리학에 대한 前理解가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전기 성리학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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