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소련과 서방연합국의 관계에서 폴란드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동부 폴란드의 합병을 요구하는 소련이 시코르스키(Sikorski)장군이 이끄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갈등을 빚은 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지만, 이 문제는 소련군이 동부 폴란드 지역에 진주하면서 다시 중대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독일이 스콜렌스크 부근의 카틴지역에서 4천 백명이 넘는 폴란드 장교들이 소련 측에 의해 집단 매장된 사실을 1943년 4월 13일 폭로함에 따라 양국간의 긴장은 극에 달하게 된다. 폴란드 망명정부가 국제조사위원회를 파견하여 진상규명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소련은 1943년 4월 25일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외교관계를 서둘러 단절하였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폴란드 장교들이 집단 매장된 것은 독일의 소행이라는 소련 측의 허위 주장을 밝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1943년 5월 8일 모스크바에서는 ‘폴란드 애국자연맹 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장차 수립될 폴란드 공산정부의 핵심이었다. 한편 시코르스키 수상의 갑작스런 항공기 추락사고(1943년 7월 3일, 지브롤터)는 당시 긴장상태를 해소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그의 후계자 미코와이칙(Mikoajczyk)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지만, 소련의 수뇌부와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서부전선에서는 독일이 패하고 있었고, 7월 소련군(적군)은 Rzeszow등 폴란드 동부지역을 점령했으며 Wisa강까지 진출하여 소련의 바르샤바 근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당시 망명정부의 수상 S. Mikoajczyk은 바르샤바에서 봉기가 일어나 바르샤바를 폴란드인의 힘으로 되찾는 것이 전후 국가의 주권을 찾는 일에서나 국경선 문제에 있어 주도권을 잡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폴란드 해방 후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을 만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