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면 과제들을 달성하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투쟁형태들도 그 대중적 성격에 맞추어 노동조합을 통한 대중파업과 노동자들의 정당 및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라는 대중운동의 형태로 변화해 갔고 이런 현상은 유럽 전반의 공통된 것이었다.
위와 같은 노동자운동의 이념적 공감대 형성과 그것의 대중화에 따른 실천적 과제들의 동질화라는 경향을 보인 이런 제반 변화는 초국가적인 노동자운동의 연대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새로운 인터내셔날 창립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2. 사상적 대립과 분열 속의 제2 인터내셔날
제1 인터내셔날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는 노동자계급 및 사회주의자들의 대회가 계속적으로 열렸으나, 아직 이 대회들이 유럽 노동자운동 전체를 포괄하는 대회로까지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인터내셔날의 창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89년 7월 14일 프랑스의 파리엑서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두 개의 국제대회가 개최되었다. 두 국제대회는 프랑스 노동자운동의 최대 분파이자 개량적 운동노선을 지향하던 소위 ‘가능주의자’(Possibilists)와 아직 프랑스 내에서 소수 분파에 머물러 있던 정통 맑스주의 분파인 ‘게드주의자’(Guesdists)에 의해 각각 주관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참석자 수에 있어서 후자(약 400명 참석)압도하였던 전자의 대회(약 600명 참석)는 겐트대회 이후의 일련의 국제대회와 도일한 운명으로 끝나고 말았던 반면 후자의 대회는 그 대회가 그대로 제2 인터내셔날의 창립대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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