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초의 다른 모든 혁명가와 社會主義지도자들과 같이 블랑키도 중산계급 출신이었다. 젊은 오귀스떼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후일 저명한 고전파 경제학자요 경제사상사가가 된 그의 형 아돌프(Jérôme-Adolphe)가 그랬듯이 명문학교들을 다녔다. 그와 그의 형은 벌써 어린 시절에 파리의 세련된 지성인세계로 들어가 한동안 당시의 영향력있던 좌익성향의 신문 지구(Globe)에 기고했다.
2. 블랑키의 사상 연구
블랑키의 사상과 행동은 흔히 공산주의적 전통에 포함되었으나 그는 어떤 직접적인혹은 단순한 의미에 있어서 바뵈푸나 부오나로티의 제자는 아니었다. 1820년대 말과 1830년대 초에 성년이 되면서 그의 지적 성장은 그들과는 자연히 달라져 갔다. 그는 20대 초에 벌써 부오나로티의 작품 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근대적 社會主義이론에 친숙해졌다. 그는 자기 형의 작품들에서 자유시장과 사유재산제도를 방어하려고 한 이론들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블랑키는 바뵈푸의 정치하지 못하고 반동적인 성향을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진보와 과학을 크게 신뢰했다. 그가 벌써 젊은 시절에 푸리에주의를 부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불변의 인간성 믿고 있는 푸리에의 신념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블랑키가 반대한 푸리에의 신념은 인간정신의 점진적 개선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블랑키는 또한 일상적 생활에서 금욕적이었으므로 푸리에의 육체적 욕망 예찬에 비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