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 근·현대사상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갑신정변 등 시대상과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면 먼저, 개항을 했던 시기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19세기말 조선정부는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과 계속되는 민란이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로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위해 대원군은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은 후 인재등용, 서원폐지, 세제개혁 등을 강행하고 경복궁을 재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유교적 전통을 말살한다 하여 천주교도를 살해하고 그 보복으로 한국 땅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를 패퇴시켰으며, 미국의 상선 셔먼호를 소각시킨 일을 빌미로 쳐들어온 미국 군함도 격퇴시켰다.
이러한 쇄국정치를 기념하기 위해 서양 오랑캐와 싸우자는 척화비를 각처에 세웠고, 대원군은 전함과 대포를 수리하고 국방을 강화시키며, 자주적 근대화의 노력도 병행하였다.
그러나 폐쇄적인 쇄국정치는 결국 일본의 독점적 침투를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호 개방의 필요성은 19세기 말 이래 중인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었고 대원군이 물러난 후 민씨 정권은 개방 정책을 내세웠다. 1875년의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과 강화도 조양이 체결되어 양국 간의 사절이 교환되었다, 이에 부산, 인천, 원산이 개항되었고,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통상조양을 맺어 국제무대에 한국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호개방 후 정부는 일본에 통신사와 신사유람단을, 청에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제도,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교 전통을 고수하자는 보수세력과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는 개화 세력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여기게 이 두 세력을 뒷받침하는 일본, 청나라간의 대립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보수.개화의 갈등은 일본에 대한 불만으로 고조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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