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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안중근의사의 동양 평화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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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2. 안중근의사의 동양 평화론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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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일본인들은 곧잘 일본은 '아시아 국가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탈아(脫亞)-흥아(興亞)의 담론은 일본의 대외정책이나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산출되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다시 말해 일본이 지리적ㆍ문화적으로 아시아의 일국이면서 일본인이 아시아를 생각할 때에는 '일본과 아시아'라고 하고 '아시아 속의 일본'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왜 일까, 환언하면, 근대일본이 아시아이면서 아시아에 거리를 두고 탈아 될 수 있었던 것은 왜 일까 하는 문제로 깔할 수 있다. 외세의 강요로 할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한 막부(幕府) 말기 일본의 정국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1867년에는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으로 정권을 내놓게 되었다. 그런 만큼 메이지 신정부를 이끌 뚜렷한 주체가 없는 데다 민권운동이 날로 격화되어 국가 존립 자체가 흔들거렸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는 자칫 잘못하면 서양 선진국에게 국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 시기에 일본의 근대국가로서의 걸을 제시하고, 현실적으로 일본 진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論吉, 1834~1901)를 들 수 있다.
문명개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은 아시아로부터 벗어나 서양사회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기술할 것이 아니라 서양의 가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860~1867년에 걸쳐 세 번이나 미국과 유럽을 직접 돌아본 후에 서양에 대한 위기감과 외경에 있었다 그 당시 아시아 각지의 항구가 서구의 식민지 상태에 처해 있는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서양의 문명 사정을 감안한 그에게 서양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 후쿠자와의 생애 최대 관심사는 일본의 봉건제 폐지와 국권의 확보, 신장에 있었다. 이는 대외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국권을 확보하여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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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1997),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서울:이산
-----(2002), 「근대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서울:역사비평사
박한규(2004), 「근대 일본 형성기의 국가와 민중」, 서울:제이앤씨
안중근(1979), 「동양평화론」, 동아일보(9월19일-24일,25일)
역민사 편집부(1993), 「재판장 마음대로 하시오」, 역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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