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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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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우리가 보통 백제 초기라고 할 때에는 3세기 중반의 고이왕(古爾王) 이전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의 초기 역사가 모두 그러하듯이 백제 초기사 역시 사료의 극심한 부족과 사료의 신빙성 여부 때문에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필자는 백제 초기사 중 백제의 기원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그 사료들 중 『삼국사기(三國史記)』 외 여러 문헌자료에 나오는 백제의 건국설화에 주목했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뉘는데 하나는 온조(溫祚)설, 나머지 하나는 비류(沸流)설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의 건국설화를 먼저 제시한 후 제시한 건국설화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을 찾아 살펴봄으로 백제의 기원을 추론해 내고자 한다.
2. 백제의 건국설화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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