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말과 1930년대 경제공황은 전 세계에 걸쳐 광범위한 생산력 저하를 가져왔고 동시에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힘입어 각국의 진보적인 정당들은 자본과 노동 사이에 '뉴딜(New Deal)', '사회계약(social contact)' 등으로 불린 사회협약을 체결하여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이론적 뿌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 시킨다는 케인즈의 경제이론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의 창출과 복지급여로 대량실업에 의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국가로 국민 개인의 삶에 관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1929년에 촉발된 대공황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가 계속되던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이른바 제1차 뉴딜이라고 불린 일련의 위기극복 정책을 폈다. 즉, 통화의 흐름과 외환거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함으로써 국민들의 은행에 대한 공포, 즉 예금의 인출 사태를 수습한 긴급은행법, 농산물 가격을 인상시키기 위해 경작면적과 생산량을 줄임으로써 몰락한 농업부문을 회생시키기 위한 농업조정법, 최저임금과 최대노동시간 및 가격 고정에 관한 기준을 정하여 '상품가격 인하 임금 삭감'이라는 악순환을 종식시키기 위한 산업부흥법(NIRA)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935년 5월 27일 대법원이 NIRA를 위헌이라고 판결함에 따라 루스벨트는 제1차 뉴딜의 국가통제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대신 정부가 대기업의 독점을 막고 노동자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루스벨트는 진보적인 색채를 띤 이른바 제2차 뉴딜정책이 시작되었다. 가장 중요한 정책이 사회보장법이었고 이 법은 뉴딜과 노동조직이 서로 정치적 동맹을 맺는데 기여한 미국 최초의 연방정부 차원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역사적 근간이 되었다.
1935년 사회보장법안이 경제보장위원회로부터 의회에 상정되자 각 집단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의회의 보수적인 의원들은 사회보장제도가 경기회복을 저해하고 노동자를 국가에 노예화시키는 사회주의적 통제정책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대체로 여론은 이 법안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 결과 1935년 6월 19일 동 법안은 76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상원을 통과했다. 그해 8월 14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사회보장법이 발표되었다.
사회보장법은 미국인의 자유주의를 고려할 때 상당한 진전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실제 입법 내용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한 제한점을 갖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