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도의 한국 도입과 진화
I. 서론
국내에 지금의 검도가 도입된 것은 개화기 격검의 형태로 일본으로 부터이다. 그후 일제강점기 군․경을 중심으로 보급되어 유도와 함께 대중화되었다(장재이 외, 2000).
일본의 전통 검도가 조선에 소개된 이후 1916년 사립 오성학교에서 검도교육 시설을 갖추어 일반 청년들에게 지도를 했고, 명칭 또한 지금의 검도로 변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학교교육으로 검도가 자리잡아가던 때이기도 했다. 문화통치기는 일반대중에게 검도가 널리 확산되어지는 계기가 마련되는 시기로서,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1921년 조선무도관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22년 사범학교의 수의과목에 채택된 후, 1927년부터는 중학교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면서 보다 확실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후 ‘전조선체육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검도가 일제 제국주의 교육도구로서 기능하던 것에서 점차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갔음을 알수 있다. 일제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며 선전하던 황국신민통치기는 검도를 신체단련, 심신수양을 위한 개인적 수련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일본 전통의 주군에 대한 충(忠),즉 군국주의적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뿌리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해방이후 검도는 일제의 잔영이라 인식되어 일반인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지게 되었으나 ‘재경유단자(在京有段者) 모임’에서 1948년 6월 3일 창덕궁 도장을 중심으로 회의명칭을 ‘대한검사회’로 개정하고 임시회장으로 강낙원(1894-)을 추대하여 검도의 한국적 발전을 꽤했다. 1953년 11월에는 ‘대한검사회’ 라는 명칭을 ‘대한검도회’로 바꾸는 동시에 조직을 재편한 뒤 대한체육회에 가맹되었다(최동재·남승우, 2007).그뒤 조직체계의 활성화를 통해 우수선수 육성과 검도인구의 저변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현재 ‘대한검도회’ 에 등록된 전국의 도장수는 약 600여 곳으로 검도애호가들이 60만에 이르고 있으며, 전국규모의 검도대회가 매년 25회 이상 개최되고 있다(김영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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