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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갑오개혁의 배경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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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갑오개혁의 배경과 내용
목 차
1. 갑오개혁의 배경
2. 갑오개혁의 내용
① 제 1차 갑오개혁
② 제 2차 갑오개혁
③ 제 3차 갑오개혁
3. 갑오개혁의 한계와 의의
1. 시대적 배경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31일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6월 2일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는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 임오군란 진압시의 전례에 따라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군이 파병되자 텐진 조약을 구실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고 양군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었다. 청은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은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안하였고 청이 이를 거절하여 회담이 결렬됨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은 표면적으로 조선의 내란은 동양평화에 위협이 되므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도모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에 내정개혁안을 제시하지만 이는 내면적으로는 전주화약으로 상실된 일본군의 주둔 명분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침략적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조선측은 교정청에서 자주적 개혁을 하고있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은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갑오왜란)하여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駉壽)·김학우(金鶴羽)·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뒤 개혁운동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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